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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로 들어간 재수생 1 동굴을 만들었다. 습하고 어둡고 은밀하게. 처음에는 내가 쉴 수 있는 나만의 장소가 필요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꿈도 공부도 포기하고 싶었다. 오래도록 그냥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시간이 무료해서 긴 동굴을 따라 걸어봤다. 어둠을 뚫고 벽을 더듬어 도달한 동굴 끝은 다른 세계로 이어져 있었다. 겁먹은 진짜 나는 동굴로 들어간다. 남겨진 가짜 나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을 산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재수생이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다. 활짝 펼친 그 날개가 매번 공부에서 꺾인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나에게 공부가 왜 이다지도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나는 매사에 죽을 둥 살 둥 공부를 해대며 미친 듯이 살지 않아도 내가 숨 쉴 수 있.. 더보기
또 야? 또 네! 또 하자! 1인칭 독자 시점 글쓰기 공모전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발표 전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한 통이 왔다. 저장이 되지 않은 번호는 안 받는 걸 원칙으로 하므로 받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이라 엄마 집에 모여서 언니들과 주꾸미 요리를 해 먹었다. 주꾸미가 제철이라 부들부들 연하고 맛났다.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잘 먹고 설거지까지 완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괜스레 후회가 밀려왔다. 전화를 받을걸. 혹시라도 공모전에서 당선되었다고 연락이 온 거면 어쩌지.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행복한 상상을 했다. 벚꽃 나무에 피어난 연한 분홍빛 꽃잎이 밤과 어우러져 하늘하늘 화사했다. 눈도 마음도 즐겁게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종일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지만 허탕이었다. 또 야? 또 네! 또 하자! 사람은 본래.. 더보기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어둑한 새벽녘의 바다는 검다. 하얀 파도가 검은 바다 위로 넘실대며 쉼 없이 밀려온다. 한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호주의 12월. 골드코스트의 해 뜨는 시간은 4시 45분. 대기업에 다니던 여자는 그 시간이면 일어나 늘 출근 준비를 했다. 이틀 전과 같은 시간에 지하철역이 아니라 바다 앞에 서 있다. 무한한 에너지를 품은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수평선 위로 붉은 기운이 옅게 퍼진다. 흥분한 아이의 얼굴에 번지는 홍조 같다. 발그레한 태양이 서서히 떠오른다. 여자가 바닷속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간다. 두 발짝. 세 발짝. “이제 끝이야. 다 끝났어...” 여자가 작게 중얼거린다. “다 끝났다고!” 도발적인 붉은 태양이 두둥실 떠올랐다. 여자는 속에 차곡차곡 담아 둔 말을 악을 쓰며 뱉어낸.. 더보기
바람 부는 날 오늘 오후부터 전국적으로 강한 바람이 불겠습니다. 노약자와 임산부는 집안에 계시고 바람 따라 훨훨 날고 싶은 빨래는 모두 마당 빨랫줄로 나오세요. 바람과 춤을 추고 싶은 아이도 마당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바람은 여러분을 초특급으로 모시겠습니다. 일기예보에서 강풍주의보를 알려주었어요. 아침에는 바람 한 점 없이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었어요. 일기예보를 비웃으며 거짓말 말아요, 하는 것 같았지요. 오후가 되었어요. 늦잠을 자고 있던 바람은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눈을 떴어요. “바람아, 어서 출동준비를 해.” 바지런한 가을 하늘이 게으른 바람을 재촉했어요. 하늘은 아침 일찍부터 까맣던 하늘을 온통 파란색 물감으로 색칠했어요. “조금만 더 자면 안 돼? 아직도 졸리는데.” “너 벌써 이 주째 잠만 자.. 더보기
두 개의 섬 바쁜 출근 시간이었다. 오가는 차들이 급정거한 버스를 흘긋 보고 무심히 지나쳐갔다.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버스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앳된 얼굴을 한 여자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었다. 딱해서 어째. 아직 젊은데. 세상에, 패딩도 새것 같은데 어떻게 저게 끼여서 죽냐. 운명도 참 지랄 맞네. 주변 사람들 말이 들렸다. 정확하게는 그들의 생각이 들렸다. 여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무심함이 교차했다. 대도시에서 사고는 예고도 없이 언제든 일어나니까. 그저 무기력하게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파리한 여자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딘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나다. 내가 죽었다. 나의 삶은 에드워드를 만나기 전.. 더보기
스콘 굽는 토끼 “토끼다!”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나를 지나쳐갔다. ‘그럼 뭐 산속에 토끼가 있지 어디에 있어. 잠깐만, 뭐? 토끼? 진짜 토끼?’ 나도 아이들이 달음질쳐 간 곳으로 달려갔다. 아이들이 핸드폰을 꺼내서 토끼를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저마다 귀엽다며 떠들썩했다. 하얀 토끼 한 마리가 궁둥이를 쭉 내밀고 땅에 배를 대고 찰싹 달라붙어서 누워있었다. ‘헐, 저게 토끼야? 뚱뚱해서 하얀 곰 같아.’ ‘요즘 스콘을 많이 먹었더니 살이 쪄서 그래.’ ‘헐, 뭐야? 토끼가 말도 해?’ 나는 쿵쾅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심호흡을 했다. 내 귀에만 들리는 건지 알고 싶었다. 한 무리의 여자아이들이 조금 멀찍이 서서 토끼를 보며 야단법석이었다. 그중 나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여자아이가 착해 보였다. 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