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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편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어둑한 새벽녘의 바다는 검다. 하얀 파도가 검은 바다 위로 넘실대며 쉼 없이 밀려온다. 한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호주의 12월. 골드코스트의 해 뜨는 시간은 4시 45분. 대기업에 다니던 여자는 그 시간이면 일어나 늘 출근 준비를 했다. 이틀 전과 같은 시간에 지하철역이 아니라 바다 앞에 서 있다. 무한한 에너지를 품은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 수평선 위로 붉은 기운이 옅게 퍼진다. 흥분한 아이의 얼굴에 번지는 홍조 같다. 발그레한 태양이 서서히 떠오른다.

 

여자가 바닷속으로 한 발짝 걸어 들어간다. 두 발짝. 세 발짝.

 

“이제 끝이야. 다 끝났어...”

 

여자가 작게 중얼거린다.

 

“다 끝났다고!”

 

도발적인 붉은 태양이 두둥실 떠올랐다. 여자는 속에 차곡차곡 담아 둔 말을 악을 쓰며 뱉어낸다.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맨살에 차가운 물결이 닿는다. 파도가 다리를 휘감는다. 바다의 심장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걸어 들어간다. 물을 무서워하는 여자가 겁 없이 물속으로 달려든다. 모든 것을 끝낼 때는 용감해져야 하는 거니까. 거센 파도가 여자의 연약한 몸 위로 부딪쳐 부서진다. 여자의 허리가 물속에 잠긴다. 여자는 주저앉고 싶다. 이제는 정말 모든 걸 끝내고 싶다.

 

밀려오는 파도에 힘없이 부서지려 할 때 누군가 여자의 왼팔을 꽉 잡는다.

 

“더 들어가면 위험해요.”

 

여자가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본다. 여자의 얼굴은 감정이 모두 지워진 삭막한 얼굴이다. 왼쪽 겨드랑이에 기다란 롱보드를 끼고 서핑 슈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다. 남자의 얼굴은 태양을 닮아 생동력이 넘친다.

 

“다 끝났어요...다..”

 

여자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남자의 파란 눈동자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괜찮아요. 마침표 찍고 새로운 문장을 쓰면 되니까.”

 

여자는 새로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회사를 그만두면 자신의 인생도 끝이 난다고 믿었다. 떼어내도 자석처럼 또다시 달라붙는 가난은 여자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다. 10년 동안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서 출근했고 해가 지고 밤하늘이 까맣게 되면 지친 육신을 이끌고 집에 왔다.

 

여자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쿨랑가라의 파도가 휘몰아치는 바다 사진이었다. 영어회화 수업에서 만난 친구가 보내 준 사진.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1시간이나 들어가는 아주 작은 평화로운 바다 마을. 어학연수하던 친구가 여행하다 우연히 만나 한눈에 반해버린 곳.

 

여자의 시선이 남자의 탄탄한 구릿빛 팔뚝에 닿는다. 그리고 서프보드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서핑 잘해요?”?”

 

남자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보고 싶어요.”

 

남자가 여자를 모래사장으로 데리고 나간다. 어느새 하늘 높이 떠오른 태양이 빛을 발한다. 바다는 떠다니는 보석 조각을 흩뿌려 둔 것처럼 빛난다. 남자가 하얀 파도를 탄다. 서핑으로 다져진 몸매는 매끈하고 유연하다. 역동적인 남자의 몸짓이 자유롭다. 긴장과 일에 치여 찌그러든 여자의 심장에 의욕이 조금씩 주입된다. 심장이 부풀고 힘차게 뛴다.

 

“서핑... 서핑을.”

 

여자의 새로운 문장이 시작된다. 가난한 가족을 부양하며 보내버린 35년간 느껴보지 못한 자유를 느낀다. 오롯이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낸다. 질리도록 바다를 보고 느끼고 책을 읽고 산책을 한다. 영어를 배우고 요리를 해서 음식다운 음식을 음미할 시간을 가진다. 꿈꾸던 쿨랑가라에서 생전 처음 서핑을 배우며 물에 대한 두려움을 물리친다.

 

12월의 뜨거운 태양이 여자의 살갗을 구릿빛으로 달군다. 여자는 보드 위에 올라서다가 미끄러져 물에 빠지기를 수백 번 반복한다. 12월 골드코스트의 해가 지는 시간은 6시 45분.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태양이 또다시 바닷속으로 가라앉기 직전 여자가 보드 위에 당당히 선다. 부서지는 파도를 타고 해변으로 미끄러져 간다. 까르르 여자의 상쾌한 웃음이 꾹 닫고 있던 작은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다. 금발의 곱슬머리 남자가 까만 머리칼을 한 동양 여자를 자랑스럽게 바라본다.

 

“배고픈데 우리 저녁 먹을까요?”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남자에게 말한다.

 

“멋진 레스토랑으로 모시겠습니다. 갈까요?”

 

남자가 여자에게 손을 내민다. 여자는 한 달 동안 서핑을 가르쳐 준 남자의 손을 천천히 잡는다. 여자는 따스한 온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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