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화

바람 부는 날

 

오늘 오후부터 전국적으로 강한 바람이 불겠습니다. 노약자와 임산부는 집안에 계시고 바람 따라 훨훨 날고 싶은 빨래는 모두 마당 빨랫줄로 나오세요. 바람과 춤을 추고 싶은 아이도 마당에서 대기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바람은 여러분을 초특급으로 모시겠습니다.

 

일기예보에서 강풍주의보를 알려주었어요. 아침에는 바람 한 점 없이 해가 쨍쨍 내리쬐고 있었어요. 일기예보를 비웃으며 거짓말 말아요, 하는 것 같았지요.

 

오후가 되었어요. 늦잠을 자고 있던 바람은 졸린 눈을 비비며 겨우 눈을 떴어요.

 

“바람아, 어서 출동준비를 해.”

 

바지런한 가을 하늘이 게으른 바람을 재촉했어요. 하늘은 아침 일찍부터 까맣던 하늘을 온통 파란색 물감으로 색칠했어요.

 

“조금만 더 자면 안 돼? 아직도 졸리는데.”

“너 벌써 이 주째 잠만 자는걸. 다들 기다리고 있어.”

 

바람이 두 팔을 위로 쭉 뻗치며 기지개를 켰어요. 순식간에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렸어요.

솨아아. 솨아아.

나뭇잎들이 신바람이 나서 떠들썩했어요.

 

“드디어 바람이 일어나려나 봐. 오늘은 춤을 출 수 있겠다.”

“맞아. 그동안 춤을 못 추어서 온몸이 찌뿌둥해.”

“벌써 내 몸이 리듬을 타고 있어. 오늘은 신나게 춤을 추자.”

“우리 윈디도 초대하자.”

“먼 호주에서 제주도까지 왔으니까 특별한 추억이 필요할 거야.”

 

나뭇잎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어요.

 

바람이 본격적으로 일어나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나뭇잎을 흔들고 지붕을 들썩이고 전깃줄을 흔들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이 펄럭거렸어요. 가발을 쓴 대머리 아저씨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걸었어요. 혹시나 바람에 가발이 날아갈까 두려웠거든요.

 

재잘대는 나뭇잎 옆을 지날 때 바람은 윈디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나랑 이름이 비슷한 아이가 왔다더니 윈디가 그 애구나.”

 

바람이 묻는 말에 하늘이 차분하게 대꾸했어요.

 

“저기 마당에 서 있는 애야. 윈디는 영어로 ‘바람이 부는’ 뜻이야.”

 

자그마하고 까만색 머리칼을 한 여자아이가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바람은 곧장 내려가 윈디의 몸을 꽈배기 모양으로 감쌌어요. 윈디가 두 팔을 벌리고 까르르 웃었어요.

 

“딱 봐도 한국 아인데. 왜 호주 사람이야?”

“윈디가 1살 때 호주 엄마 아빠가 입양했어.”

 

윈디는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입양이라는 단어를 몰랐어요. 어느 날 학교에서 중국 아이와 일본 아이가 다가왔어요. 멜버른에 이민 온 아이들이었지요. 둘 다 영어가 서툴렀어요. 중국 아이가 중국말로 인사했어요.

 

“니하오.”

 

윈디는 중국 아이를 멀뚱거리며 쳐다보았어요. 반응이 없자 일본 아이가 인사했어요.

 

“곤니치와.”

 

역시 윈디는 아무 말 없이 두 아이를 번갈아 보았어요.

세 아이는 한동안 쭈뼛쭈뼛 서로의 곁을 서성거렸어요. 이번에는 윈디가 용기를 냈어요.

 

“렛츠 플레이! (놀자!)

 

세 아이는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재미나게 노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네를 타고 시소를 타고 나무 막대기를 들고 까르르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어요. 어느새 각자의 엄마가 도착했어요. 아이들이 엄마에게 뛰어갔어요. 중국 아이는 중국 엄마에게로. 일본 아이는 일본 엄마에게로. 윈디는 호주 엄마에게 뛰어가다가 두 아이의 엄마를 번갈아 보았어요. 두 아이가 엄마 품에 안겼지요. 윈디는 호주 엄마 품에 안기며 이상한 감정을 느꼈어요.

 

“엄마, 나는 왜 엄마와 다르게 생겼어?”

 

자상한 호주 엄마는 윈디를 숨이 막힐 정도로 꼭 끌어안으며 말했어요.

 

“윈디를 낳아준 엄마는 따로 있거든. 바람이 심하게 불던 날 윈디가 엄마와 아빠한테 온 거야. 따사로운 햇살 같은 선물이었단다. 엄마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우리 윈디를 사랑해.”

 

윈디는 갑자기 숨을 쉴 수 없었어요. 호주 엄마가 너무 꽉 안아서 그런 줄 알았어요. 엄마가 둘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에 커다란 돌이 툭 떨어졌어요. 그때부터 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답답했지요. 번쩍 덜어서 바깥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리 해도 윈디의 힘으로 들 수 없었어요.

 

“나를 낳아 준 엄마는 어디에 있는데?”

“한국에.”

“거기가 어디야?”

“윈디, 엄마랑 아빠랑 한국에 가 볼까?”

 

자그마한 윈디의 두 눈에 호기심이 가득 찼어요. 호주 엄마의 눈을 들여다봤어요. 커다란 호주 엄마의 눈은 윈디와 퍽 달랐어요. 금발의 엄마 눈에 까만 머리의 작은 눈을 한 자신이 보였지요. 윈디와 비슷하게 생긴 한국 엄마가 보고 싶었어요. 윈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호주 엄마는 윈디 손을 잡고 함께 고개를 끄덕여주었어요.

 

윈디 가족은 일주일 전에 서울에 왔어요. 수소문해도 한국 엄마를 만날 수 없었어요. 고향이 제주도였다는 것 말고는 한국 엄마에 대해 알 길이 없었어요.

 

‘쳇, 한국 엄마 따위는 필요 없어. 나한테는 호주 엄마가 있으니까...’

 

윈디는 강한 척 밝은 척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공기가 거의 다 빠져버린 인형처럼 흐느적거렸어요. 밥도 먹기 싫었고 한국이 싫었어요. 한국 엄마를 본다는 기대감에 많이 설레던 자신이 한없이 바보 같았어요.

 

호주 엄마 아빠는 윈디에게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어요. 세 사람은 아름다운 제주도를 방문했어요. 바람과 하늘과 나뭇잎이 윈디의 호주 엄마 아빠의 마음을 전해 들었어요. 모두 같은 생각을 했어요.

 

“우리 윈디가 잊지 못할 추억거리를 만들어주자. 제주도 초특급 바람에 태워 주는 거야.”

 

바람을 좋아하는 윈디가 제주도 민박집 마당으로 나왔어요.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제각각 몸을 흔들고 있었어요. 담벼락 옆에 쭉 늘어서 있는 나무들의 나뭇잎도 질세라 몸을 흔들고 있었어요. 마당 한구석에 있던 비닐봉지도 사뿐히 날아올라 발레리나처럼 춤을 추었어요.

 

윈디도 답답한 마음을 열어젖히고 두 팔을 벌리고 섰어요. 바람이 살갗에 닿는 걸 느꼈어요. 한국 엄마가 바람이 되어 나타난 것 같았어요. 윈디가 좋아하는 바람이 되어 함께 춤을 추려고 온 거라고 상상했어요. 윈디가 공중으로 날아올랐어요. 가을날 오후의 상쾌한 공기를 가르며 나뭇잎 사이를 날았어요. 나뭇잎들이 손뼉을 치고 장단을 맞추어 춤을 추었어요. 아주 근사한 경험이었어요. 솨아아 솨아아 소리를 추억 주머니에 담아 두었어요. 호주 멜버른으로 돌아가면 꺼내보려고요.

 

솨아아 솨아아!

 

멜버른 바람이 신호를 보내요. 윈디는 씩 웃으며 창문을 활짝 열어요. 호주 엄마가 올라와서 창문을 꼭 닫으며 말해요.

 

“오늘 바람이 무척 센걸. 우리 윈디 제주도 생각나겠다, 그렇지?”

 

윈디의 얼굴이 제주도 생각에 환해져요.

 

“윈디, 그래도 위험하니까 창문은 닫자.”

 

윈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요. 호주 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요. 호주 엄마도 한국 엄마처럼 자신을 버릴까 봐 겁이 나요. 엄마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다시 창문을 활짝 열고 두 팔을 벌려요. 바람이 얼굴에 닿고 살갗에 닿으면 얼굴에 둥근달이 번져요. 간지럽고 시원하고 행복해서 윈디가 웃거든요. 제주도에서 느낀 바람이 다시 살아나요. 눈을 감고 바람이 윈디의 몸을 휘감도록 잠시 기다려줘요. 윈디가 바람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라요. 윈디가 잡을 수 있도록 바람은 큰 뿔을 두 개 만들어줘요. 윈디는 그 뿔을 잡고 외쳐요.

 

“바람아, 날아보자!”

 

윈디가 넓은 하늘을 거침없이 날아요. 윈디 몸을 둘둘 말고 있던 투명 밧줄이 툭툭 끊어져요. 입양된 아이. 한국 아이. 호주 엄마. 다른 외모. 그러고 나면 그냥 바람을 좋아하는 윈디가 되어요.

 

윈디는 이제 한국말을 배워요. 다시 한국에 가 보고 싶거든요. 한국 엄마를 만나면 춤을 추고 싶어요. 제주도에서 바람 부는 날 윈디가 바람을 타고 추었던 춤을. 함께.

 

 

'동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콘 굽는 토끼  (4) 2021.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