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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동굴로 들어간 재수생

동굴로 들어간 재수생 1

동굴을 만들었다. 습하고 어둡고 은밀하게. 처음에는 내가 쉴 수 있는 나만의 장소가 필요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꿈도 공부도 포기하고 싶었다. 오래도록 그냥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 시간이 무료해서 긴 동굴을 따라 걸어봤다. 어둠을 뚫고 벽을 더듬어 도달한 동굴 끝은 다른 세계로 이어져 있었다. 겁먹은 진짜 나는 동굴로 들어간다. 남겨진 가짜 나는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에서 살아내야 하는 삶을 산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재수생이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리고 싶다. 활짝 펼친 그 날개가 매번 공부에서 꺾인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나에게 공부가 왜 이다지도 중요한지 잘 모르겠다. 나는 매사에 죽을 둥 살 둥 공부를 해대며 미친 듯이 살지 않아도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작년에 그냥 성적에 맞는 대학에 가고 싶었다.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내로라하는 대학교에 가지 않으면 이후에 이어지는 사회생활 자체가 뒤틀린다고 말했다. 청년실업이 거론되었고 이왕 가는 거 모양새가 나게 가 봐야 하지 않겠냐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런데 어른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미디어에서 내내 외쳐대는 청년 실업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설득당해갔다. 문제는 엄마의 열의를 내가 따라갈 수 없었다는 거다.

 

나는 평일에는 미술학원에서 밤 10시까지 그림을 그렸고 주말에 국어와 영어 과외를 하고 또 미술학원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내 속에 잠겨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은 꽃도 못 펴보고 점점 더 시들어갔다.

 

고등학교는 잔인하게도 등급이라는 걸 만들었다. 마치 도축된 고기에 등급을 매기고 호텔에 별 개수를 달아 등급을 매기듯이 대한민국 고등학생은 등급으로 매겨진다. 내신 등급은 전교 석차로 따진다. 내 앞에 몇 명이 있는지에 따라서 나의 등급이 결정된다. 나는 종종 등급 자체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5등급입니다, 라고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가 그 등급을 만드나? 그들은 우리를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학교 시험은 우리를 등급으로 매길 만큼 객관적일 수 있을까?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지만, 현실은 그따위 물음표는 쓰레기통에나 던져버리고 시험공부나 열심히 해서 더 높은 등급을 따라고 내 등을 떠민다.

 

나 스스로 수없이 물었다. 너의 최선을 다했니? 90% 이상은 했어,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줄리아 선생님을 만난 후부터 내 삶을 포기한 적이 없다. 나도 사람인지라 100%까지 해내지 못했다. 대학에 떨어지고 나머지 10%를 채웠더라면 내가 지원했던 대학에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를 괴롭혔다. 아주 가끔이었지만 끈질기게.

 

나에게는 친한 친구가 둘 있다. J는 경기도에 캠퍼스가 있는 대학에 합격해서 대학 생활을 하고 있다. 부모님 성화에 대학에 발을 들였지만 무기력하다고 했다. 딱히 전공하고 싶은 과도 없었다. 대학 이름만 보고 들어간 대학 생활은 J가 꿈꾸어 오던 환상을 단박에 깨버렸다. S는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노량진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 집안 형편이 어렵기도 하고 지성인을 키우는 곳이 대학이라는 말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셋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진로를 결정한 후 5월에 딱 한 번 만났다. 내 생일이었다. 그때 J가 말해줬다. 마음에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다고. J는 연못 옆에 바람이 잘 통하는 정자를 만들었다. 마음이 힘들 때면 들어가서 쉰다고 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직 못 찾았다는 친구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재수하는 내가 부럽다니. 순간 나는 화가 났다. S도 같은 말을 했다. 자신도 나처럼 간절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꿈이 없다고 했다. 그냥 실속 있게 살고 싶어서 공무원 준비를 미리 한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건 내가 이루고 싶은 간절한 꿈일까? 나도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행복하니까 미대에 가기로 했다. 엄마의 생각이었지만 싫지 않았다. 근데 대학에 떨어졌고 어쩔 수 없이 재수 생활을 한다. 친구들은 나의 재수 생활을 꿈을 이루기 위한 용기 있는 몸부림이자 열정의 흔적이라고 했다. 자기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수 없다며. 우리는 모인 날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자고 했지만 11시에 일어나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은 처진 서로의 어깨를 도닥이며 그 약속은 다음에 더 잘 돼서 하자고 위로했다.

 

종일 재수학원과 미술학원을 전전한 후 집으로 오는 길은 어둑하다. 그 시간이 내가 편히 쉴 수 있는 동굴을 떠올린다. 내 방에 들어설 때면 누가 손가락으로 톡 치기만 해도 쓰러질 만큼 지쳐있다. 옷도 못 벗고 그대로 침대로 털썩 쓰러지면 나는 동굴로 들어가 진짜 나를 만난다.

 

나는 눈을 감는다. 동굴 속은 습하다. 물방울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똑똑 떨어진다. 동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단잠을 자고 있던 박쥐가 발소리를 듣고 퍼드덕 내 머리 위를 스치고 날아간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획 숙인다. 먹물 색 어둠뿐이다. 눈이 안 보인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지금 내 심정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나는 오감을 총동원해서 어둠 속을 한 발씩 앞으로 걸어간다. 이 동굴은 내가 만들었으니까 안전하다는 믿음이 나를 계속 가게 한다.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돌돌 말아서 내 뒤에 있는 물웅덩이에 던져 넣는다. 돌부리에 발이 걸리고 넘어진다. . 짧은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온다. 한참을 걷는다. 탁한 동굴 속 공기에 상쾌한 공기가 섞이는 게 느껴진다. 한 줄기 빛이 동굴로 쏟아져 들어오는 게 보인다. 다다른 동굴 끝은 막혀 있지 않다. 아치 모양을 한 입구가 하나 있다. 기다란 풀잎이 아래로 처져 있다. 풀잎 커튼을 두 손으로 가르고 나는 밖으로 나간다.

 

시원하게 펼쳐진 선명한 초록 잔디 위에 크림색 양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양 떼 뒤로 뾰족한 첨탑이 여러 개 하늘로 솟아 있는 성이 있다. 양쪽으로 두 그루의 거대한 나무가 우뚝 서 있다. 마치 성을 지키는 가드처럼. 내 키만 한 풍선이 하늘에서 천천히 내려온다. 동그랗고 투명하다. 내 앞에 착지한 풍선의 투명 문이 열리고 내가 들어서자 안락의자 하나가 모양을 드러낸다.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이 박아 넣고 편안하게 앉는다. 풍선의 문이 닫히고 두둥실 떠오른다.

 

하늘을 난다. 풍선도 그 속에 있는 나도. 한곳에 모아 꿰매 두었던 모든 감정이 일제히 실밥을 뜯고 나와 얼굴에 살아난다. 바람이 분다. 길게 자란 풀잎에 숨겨져 있던 하양, 노랑, 분홍, 빨강, 보라색 들꽃이 하늘거린다. 솨아솨아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나뭇잎은 무용수가 되어 쏟아지는 햇살과 춤을 춘다. 내 바로 옆에서 새가 힘찬 날갯짓을 하며 날고 있다.

 

나는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풍선에 두 손을 갖다 대고 멀리 날아가는 새를 본다. 평소에 무미건조하던 내 두 눈이 환희로 가득 찬다. 풍선 아래를 내려다본다. 성 옆으로 흐르는 강에 백조와 흑조가 우아하게 유영한다. 금을 뿌려 둔 것처럼 강물이 반짝인다. 갑자기 들꽃이 하나, 둘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백조와 흑조도 떠오른다. 저 멀리 보이던 성도 가뿐히 두 나무와 날아오른다. 풍선 아래 보이던 모든 게 날아올라 내 주변에 떠 있는 신묘한 장면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 우와 멋지다! 모든 게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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