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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소설처럼

그러면 넌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한 시간은 얼마나 알뜰하게 쓰일 수 있을까? 올해 중학교 1학년이 된 S는 오자마자 능률 보카 단어를 4일 치 외운 것을 확인받고 제대로 외우지 못한 단어는 단어장에 적었다. 또 단어장에 있는 단어 25개를 직접 쓰며 단어 시험을 봤다. 다음은 단어장에 있는 단어로 만든 문장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영어 글쓰기를 선생님 J와 같이 확인하고 틀린 부분을 고쳤다.

 

J는 시계를 흘긋흘긋 보았다. 1시간 안에 주어진 미션을 마칠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중이었다. 띠띠띠 띠띠띠. J의 작은 눈이 안경 너머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어 문법책, 듣기 책, 그리고 독해 책을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는 중이었다.

 

그저께 듣기를 했으니까 오늘은 리딩을 공부해야 해. 균형. 균형이 중요해.’

 

J의 전혀 날렵하지 않은 뭉툭한 손가락이 쏜살같이 책을 펼쳤다. S가 큰 소리로 영어를 읽고 독해를 했다.

 

독해 내용은 이랬다. 사람의 기저면 위에 무게 중심이 있으면 균형이 유지되고 아니면 균형을 잃는다는 내용이었다. J는 난감했다. 기저면을 설명해야 했다. 영어로는 base of support. 영어 그대로 지지를 해 주는 기본이 된다는 뜻인데 책에는 긴 해석이 쓰여 있었다.

 

기저면은 인체나 물체가 지면에 접촉하고 있을 때 지면에 접촉된.... 블라블라 블라... 중간....블라블라블라... 생략하고 인체의 경우 자세에 따라 달라진다.

 

J는 또 한 번 시계를 흘긋 보았다.

 

긴 설명은 생략하자. 소중한 시간이 가고 있잖아.’

 

그리고 얼른 그림에 동그라미를 치며 기저면과 무게 중심을 설명했다. 영어 문제를 푸는데 기저면에 대한 정의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않아도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girls가 무릎을 꿇고 앉아 등 뒤로 손을 깍지 끼고 고개를 앞으로 숙이면 코로 앞에 놓인 컵을 쓰러뜨릴 수 있다는 거야.”

에이, 더러워요. 그러다가 콧물이 컵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해요?”

 

S에게는 코가 컵에 닿는 다소 청결하지 못한 행동이 더 중요했다. 기저면이고 무게 중심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더럽긴. 네 코가 닿는 건데. 집에서 해 봐. 자 집중. 중요한 것은 boys는 똑같은 자세일 때 기저면은 똑같이 무릎에서 발가락 끝까지인데 무게 중심이 어깨에 있어서 컵을 쓰러뜨리기 전에 중심을 잃는다는 거야. 어때 이해했어?”

 

SJ가 한 말을 곱씹는 것인지 계속해서 코가 청결을 유지해야 하는 컵에 닿는 더러운 장면을 상상하는 것인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J는 대한민국의 영어 수능 독해를 아이들과 같이 풀어주고 일반 독해 책을 같이 읽으면서 한결같이 느끼는 게 있다.

 

우리 아이들이 대단한 거지. 한국말로도 모르는 단어를 외우고 그 단어가 들어간 영어문장을 이해해야 하고. 그래도 갈 길이 멀단다, 얘들아. 힘내자!’

 

J가 감상적인 느낌을 떨쳐내려고 잠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어깨에 묵직한 책임감이 내려앉았다. 틀린 문제를 보고 다시 정답을 고치게 했다. S는 이번에는 틀린 문제의 정답을 제대로 찾았다.

 

영어 지문이 물 흐르듯 이해가 되어야 하는데 뇌 한쪽이 막혔던 것이다. J와 함께 다시 읽고 나니 막힌 부분이 뻥 뚫렸고 다시 뇌의 혈류 흐름이 원활해졌다. 그제야 S가 진지한 눈빛으로 J에게 물었다.

 

근데요, 쌤. 나는 여자 아인데 똑같은 자세를 하고도 컵을 못 넘어뜨리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J는 엉뚱한 질문을 좋아했다. J의 얼굴에 옅은 미소와 장난기가 섞인 다소 복잡한 감정이 엇갈렸다. 잠시 뜸을 들이고 J가 아주 진지하게 답변했다.

 

그러면 넌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

 

SJ는 눈을 마주 보며 잠시 그대로 있었다. 알림이 울렸다. 1시간이 경과했다는 신호였다. 두 사람의 닫혀 있던 입술 사이로 경쾌한 소리가 흩어져 나왔다.

 

흐흐흐흐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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