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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소설처럼

X Japan에서 이무진까지

일요일은 J에게 24시간의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날이다. 일도 청소도 수업 준비도 안 해도 되는 날이다. 저녁을 먹으러 가까운 엄마 집에 가는 일 말고는 뭐든 할 수 있는 날이다. 일곱 시부터 눈을 뜬 J는 침대에서 뭉그적거렸다. 눈두덩이가 눈에 들러붙은 것처럼 안 떠지는데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었다. J는 벌떡 일어나면서 낮게 뇌까렸다.

 

Damn 목디스크!

 

아침으로 팬케이크를 할까 잠시 생각했다. 그때 며칠 전에 사 둔 햇감자가 떠올랐다. 더 방치했다가는 싹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자를 꺼내왔다. 옆에 있던 당근도 가져왔다. 흙 당근을 꺼내 보니 가느다란 수염 같은 싹이 허옇게 올라와 있었다.

 

으악. 어째! 내가 너를 잊고 있었네. 오늘 널 써야겠다.

 

J는 컴퓨터를 켜고 유튜브에서 이무진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여러 영상이 좌르르 화면에 떴다. 어제 학생 K가 좋아한다고 했다. 음악을 틀어두고 당근을 전부 꺼내 깨끗이 씻고 껍질을 쓱쓱 깎아 냈다. 다음으로 작고 동글동글한 감자 여섯 개를 꺼냈다. 흙을 깨끗이 씻어내고 칼집을 중간에 조금 내고 물에 넣어 삶았다. 달걀을 삶고 당근, 오이, 양파를 작게 썰며 내내 이무진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J가 어려서 듣고 자랐던 원곡이 이무진스럽게 탈바꿈해서 J의 몸을 흐느적거리게 했다.

 

삶은 달걀껍데기를 까는데 잘 안 까졌다. 겨우 다 까내고 보니 흰자위가 이리저리 뜯겨 나갔고 완숙으로 삶는 걸 잊어서 노른자가 조금 덜 익었다.

 

Oh well, never mind.

 

아무래도 괜찮았다. 마요네즈와 머스타드, 감자와 버무려지면 먹을 만할 것이다. 감자는 포슬포슬 잘 삶겼다. 채소는 삐뚤빼뚤 썰어졌다. 그 또한 괜찮았다. 그냥 버무릴 거니까.

 

커피 원두를 두 스푼 그라인더에 넣어 커피를 갈고 작은 식빵 하나를 토스터에 넣었다. 물이 끓고 커피를 천천히 내렸다. 커피 향이 작은 공간을 그득 채웠다. 커피 한 잔과 감자 샐러드 오픈 샌드위치를 만드는데 걸린 시간은 거의 한 시간 반. 좁은 주방과 싱크대는 이미 난리가 났다. J는 정리가 필요한 그것들을 외면하고 기쁜 마음으로 컴퓨터에 앉았다.

 

이번에는 어제 들었던 X Japan의 ‘Say anything’을 들었다. 학생 B가 추천해 준 곡이다. 노래를 듣고 있자니 1991년 그 자리에 자신도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케스트라의 반주가 퍼진다. J는 X Japan의 수많은 팬 틈에 엉거주춤 서서 메인보컬의 머리 모양에서 눈을 못 떼고 쳐다보고 있다. 음악에 맞추어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노래를 듣는다. 문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Say anything 말고는 어떤 말도 J의 뇌가 읽어 내지 못했다.

 

J는 자기 나름대로 가사를 붙여봤다.

 

너를 만난 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어. 나 너를 사랑했으니까.

가장 슬픈 일이기도 했지. 너와 이별했으니까.

Say anything.

너는 지금 행복하니? 나는 행복해.

다른 사랑을 찾지 못했지만 나를 찾았으니까.

Say anything.

 

*

 

요즘 수업에 자꾸 빠지고 졸고.

숙제도 안 하고. 단어도 안 외우고. 영어가 하기 싫으니?

너는 묵묵부답.

Say anything.

 

*

 

너 어제 우리 약속 있었던 거 잊었어?

까먹었어.

뭘 그런 걸 까먹어. 앞으로는 귤만 까먹어.

환하게 웃는 나를 보며 너는 아무 말이 없었지.

Say anything.

그제야 네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지.

우리 헤어지자.

뭐, 왜?

너의 아재 개그가 이제는 신선하지 않아.

내가 더 노력할게.

너는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봤지.

Say anything.

 

J는 엉뚱한 가사를 달아대며 키득거렸다.

 

유채훈의 일몬도와 Jimmy Fontana의 il mondo , 고은성의 Reste와 Gims와 Sting의 Reste, 에델 라인클랑의 뮤지컬 풍의 담배가게 아가씨, X Japan의 Say Anything, Tears, Without You, Endless Rain, 이무진의 골목길, 누구없소, 바다에 누워, 무릎, 휘파람, 꿈, 산책, 아이유와 함께 부른 라일락. VITTA & SLIMANE의 Je te le donne와 흉스프레소의 Je te le donne, 이벼리 백형훈의 Aspettero, 포레스텔라의 shape of you, 흉스프레소의 Husavik, my own hero. 박강현 이충주의 꽃이 피고 지듯이, 조승우의 꽃이 피고 지듯이. 고우림 이충주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최근에 J가 들으면서 귀 호강을 시켜준 노래들이다. J는 매일 아침 재즈 라디오를 틀어두고 글을 쓴다. 오후에는 호주 라디오 방송을 틀어두고 잠시 호주 영어 발음에 취한다. 그런 J에게 2021년을 살아가는 두 십 대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어보는 일은 뭐랄까 매일 같은 메뉴를 먹다가 색다른 걸 먹고 기분이 퍽 좋아서 씩 웃는 얼굴 같다.

 

J는 앞으로 기분이 좋아서 씩 자주 웃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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