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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소설처럼

허구의 삶에 대하여

“Honey, a novel, not a noble.”

 

S가 받아쓰기해 온 영어 듣기 내용을 고쳐주며 J가 말했다.

 

(J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honey’라고 부른다. 저 꿀 아닌데요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왜 자기를 honey라고 부르냐고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J가 쓰는 honey는 애정을 담아 아이를 부르는 호칭이다.)

 

S가 졸음이 그득한 두 눈을 껌뻑거렸다.

 

“novel? 그게 뭔데요?”

쌤이 좋아하는 거 있잖아.”

, 소설이요.”

. fiction이라고도 해.”

그건 뭔데요?”

허구.”

그건 뭔데요?”

허구? 음...... 사실이 아닌데 사실처럼 만들어내는 뭐 그런 거 있잖아.”

, 거짓말이요. 그럼 쌤은 거짓말 쓰는 걸 좋아하는 거네요.”

 

JS의 눈이 만났다. 흐흐흐흐흐흐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같은 소리가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그렇다. S의 지적처럼 J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사실처럼 쓰는 걸 좋아한다. J가 수필이나 인문학 책보다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가 허구에 있다. J는 허구의 삶을 상상한다. 머릿속에서 연기처럼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어렴풋하게 피어오르던 상상이 글자로 나열되어 하나의 허구의 삶이 탄생하는 그 과정을 좋아한다.

 

사실, J는 어려서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창밖을 내다보며 앉아서 온갖 상상만 했다. J의 엄마가 큰맘 먹고 사주었던 세계 명작 50선과 위인전 50권이 아마 어린 시절 읽은 책 전부였을 거다. 그 책을 다 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억은 없다. ‘삼총사톰 소여의 모험을 읽고 모험을 꿈꾸었던 기억만 어렴풋하다.

 

지금에서야 책이 좋아진 J는 간혹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 그때부터 차곡차곡 책을 읽었더라면 더 그럴싸한 허구의 삶을 그려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하며. 요즘 아이들처럼 책을 많이 읽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한다. 물론 유튜브 조회가 책을 읽는 횟수보다 더 많은 세대다. 그래도 J의 주변에는 책장에 책이 가득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끊임없이 빌려다 읽는 아이가 많다. J는 종종 그 아이들이 부럽다.

 

어린 시절이 그러했으니 이후 쭉 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J의 삶은 당연한 결과였다. 대학생 시절에는 오죽했으면 보다 못한 언니가 대학생이 책을 그렇게 안 읽냐고 타박을 했으니 말 다 했다. 솔직히 그때는 그랬다. 사람들이 왜 소설을 읽는지 몰랐다. 누군가의 허구적인 삶을 들여다보는 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심지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J는 지금에서야 때늦은 후회를 한다. 그래도 서로를 외면한 긴 세월 후에 드디어 J와 허구는 만났다. 이금이 작가의 허구의 삶에 나오는 허구는 아니지만. J는 최근에 이 책을 제목만 보고 궁금해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주인공 이름이 허구. 작가의 탁월한 아이디어에 J는 감탄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의 인생만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하나의 인생만 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야. 허구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J는 궁금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인생 말고 어떤 인생을 또 다른 J가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평생토록 소설 읽기를 돌같이 보아온 J가 이제야 허구의 삶에 푹 빠져있다. J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많이 읽히지 않아도 쓰고 싶으면 써야 한다. 너에게는 능력이 없는 거 아니야?라는 문장이 날카롭게 마음에 꽂혀도 써보기로 한다. 수시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자격지심을 뻥 걷어차 버리고 꾸준히 써 보자 한다.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받아들이고 마주해야 하는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사람들은 일상에 지친 마음을 허구의 삶에 기댄다.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책과 웹소설을 읽고 웹툰을 본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멀리하는 이들도 있다. 그 시간에 주식투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외국어 공부를 하면서. 또 누구는 수많은 콘텐츠를 담은 유튜브만 본다. 게임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게임에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J는 최근에 한 학생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그 또한 허구의 삶에 아이들이 빠지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현실에서 내가 못 하는 일, 가령 몬스터와 싸우고 전사가 되고 레벨업이 될수록 막강해지고. 허구는 우리 삶 곳곳에 녹아있다.

 

J는 이제야 넷플릭스에 올라온 괴물을 본다. 텔레비전이 없으니 항상 느리다. 사람들이 신하균의 연기에 감탄할 때 궁금했다. 어떤 내용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이제야 그 궁금증을 확인할 것이다. 매일 밤 하루를 다 끝내고 괴물에서 풀어내는 허구의 삶에 지친 어깨를 기댈 것이다.

 

J는 오늘도 거짓말 같은 허구의 삶을 쓴다. 누군가 J가 쓴 허구의 삶에 지친 어깨를 기댈 수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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