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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동굴로 들어간 재수생 4

줄리아 선생님이 오썸을 조종한다. 우리 눈 아래로 보라색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 중앙에 거대한 무지개가 떠 있다. 오썸이 우리를 무지개 맨 위에 올려 두고 제일 먼저 무지개를 타고 내려간다. 오썸의 얼굴이 웃음으로 물결친다. 다음으로 내가 무지개를 타고 쭉 내려간다. 기분이 끝내준다. 바다에 빠지기 직전에 투명 풍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받는다. 줄리아 선생님도 은수야! 오썸아, 하고 소리 지르며 내려온다. 또 다른 투명 풍선에 착지한다.

 

풍선은 바다에 둥둥 떠 있다. 줄리아 선생님이 손을 뻗어 풍선 바깥으로 내민다. 나도 그렇게 한다. 우리 둘은 손을 잡는다. 나중에 선생님의 꿈과 내 꿈이 이루어지면 선생님이 그리워하는 호주 골드코스트 바다에 같이 가기로 했다. 우리는 지금 그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다. 풍선을 타고 손을 잡고. 함께. 선생님의 따스한 마음이 전달된다. 오썸이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창공을 가르며 기쁨의 불을 뿜어댄다.

 

내 영어가 바닥을 치던 고1 때 선생님을 만났다. 그때 내 성적은 언급하기에도 부끄러운 숫자였다. 선생님과 영어로 문장을 만들고 차근히 공부하면서 영어가 늘었다. 기면증 때문에 중간에 학교 성적이 18점이 나왔을 때도 선생님은 나를 계속 격려했다. 나는 다시 마음을 잡고 기말고사 준비를 해서 50점까지 끌어올렸다. 유일하게 나와 기뻐했던 사람이 줄리아 선생님이다. 시험은 숫자로 나를 표현한다. 줄리아 선생님은 나를 그 숫자로 보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 노력을 봐주었다. 엄마는 그랬다. 그 성적으로 참 좋기도 하겠다고. 엄마는 나의 노력보다 결과가 상위권에 미치지 못하는 걸 속상해했다.

 

공부가 하기 싫었다. 엄마한테 반항하고 싶었다. 그때 줄리아 선생님이 그랬다. 엄마가 미워서 내 삶을 아무렇게나 막사는 게 반항이 아니라고. 내가 원하는 삶을 내 능력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되는 게 진정한 반항이라고. 내 인생은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그 말이 내 삶을 바꿨다.

 

- 내가 최선을 다해도 안 되면 어떻게 해요?

 

- 은수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돼. 미래에 대한 지나친 생각은 현재를 갉아먹어. 생각은 할수록 부풀기도 하고. 두렵고 기운이 쭉 빠질 때는 구체적인 일을 해봐. 그림을 그리고 영어 공부를 하고 책상 정리를 하고 고양이와 놀아주고.

 

- . 선생님. 나 다시 해 볼게요.

 

출렁이는 바다 물살을 가르고 돌고래가 나타나서 우리 주변을 돈다. 두 마리가 동시에 힘찬 동작으로 뛰어오른다. 투명 풍선에 물이 튄다. 우리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투명 풍선을 통과해서 밖으로 튕겨 나간다. 돌고래를 간지럽힌다. 돌고래가 웃는다. 멀리서 거대한 파도가 밀려온다. 돌고래는 파도를 타고 우리를 해변으로 밀어준다.

 

나는 눈을 뜨고 동굴에서 나온다. 오후 수업이 시작되는 교실로 힘차게 걸어간다.

 

나는 3주 동안 동굴로 들어가지 않았다. 있는 힘을 다 짜내서 현실의 내 삶을 살았다. 모든 물음표를 한 묶음으로 돌돌 말아서 묶어두었다. 그리고 집중했다. 공부에 집중하고 나에게 집중했다. 이제 사흘 후면 수능이다. 11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이번에도 수시에 다 떨어졌다. 얼마 전 수시 결과를 본 엄마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불안이라는 굵은 두 줄이 엄마 얼굴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시에 합격한 친구와 나를 비교하며 야단치는 엄마에게 조용히 말했다.

 

- 엄마, 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여기서 더 하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더 해야 하는지 몰라. 엄마가 알려줘. 나 뭘 어떻게 더 해야 해?

 

엄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정말 더는 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의 대답은 간결했다.

 

- .

 

엄마는 며칠 동안 나와 말을 하지 않고 앓아누웠다. 어느 날 일어나서 다시 일하러 갔고 더는 나의 성적을 운운하며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지쳐서 돌아오는 나를 묵묵히 맞이한다. 내 마음속에 엄마에 대한 원망이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조용히 나를 맞아주는 엄마를 보며 강렬하던 감정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엄마가 삶아 놓은 홍합탕을 한 그릇 다 먹는 동안 엄마와 나는 말이 없다. 그냥 간간이 서로를 쳐다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감칠맛 도는 홍합탕을 깨끗하게 한 그릇 비우고 나는 씻는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 침대에 눕는다. 잠시 눈을 감는다.

 

요즘 들어가는 동굴은 확연히 다르다. 조금씩 환해지고 있다. 기이하게 생긴 동굴 벽도 보이고 졸졸 흐르던 물도 보일 만큼. 나는 동굴 벽에다 그림을 그린다. 줄리아 선생님, 오썸이, 그리고 대학에 합격한 나를 그린다. 우리가 하늘을 나는 그림을 보며 나는 씩 웃는다.

 

아치형 입구를 통과해서 나온 곳은 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는 숲이다. 신선한 공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온다. 기분이 상쾌하다. 나무 사이로 오두막이 한 채 있다. 오두막집 굴뚝으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누가 있을까? 나는 천천히 걸어가서 노크하고 기다린다. 인기척이 없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선다.

 

오두막에는 아무도 없다. 겉보기에는 아주 작고 평범해 보이는데 문에 등을 기대니 뒤로 집이 그만큼 늘어난다. 신기해서 작은 탁자를 양손으로 잡고 늘려본다. 내가 늘이는 만큼 늘어난다. 나는 벽을 향해 달려본다. 벽에 부딪힐까 봐 조금 겁이 나지만 힘껏 달려본다. 내가 달려간 만큼 오두막은 늘어난다. 커다란 탁자 위에 갓 구운 머핀과 바닐라 라떼가 있다. 천천히 머핀과 라떼를 음미하며 먹는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스케치북을 열고 탁자 크기만큼 당겨 늘린다. 4B 연필이 하나만 있던 필통을 양손으로 잡고 쭉 늘려본다. 순식간에 수많은 색연필이 조르르 놓인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이 아닌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린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좋다. 내 손을 통해서 세상에 없던 그림이 탄생하는 그 과정이 행복하다. 과정이 곧 보상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결과가 어떨지 무섭다. 하지만 생각하지 않고 이 과정을 즐기기로 한다. 제도가 만들어 낸 실패는 어쩌면 내가 성장하는 하나의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오든 나는 성장할 것이다. 아프고 기쁘고 설레고 두려울 거다. 그게 삶이니까.

 

오롯이 내가 나와 만나는 이런 공간이 좋다. 힘이 들면 이렇게 살면서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을 조금씩 덜어내면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동굴이 그랬고 동굴을 통해 만난 다른 세계가 그랬다. 숲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동굴에 서서 나는 말한다.

 

- 당분간 우리 작별하자. 어떤 결과로 너를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다시 올게. 너를 통해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어 행복했어.

 

- 나도. 나도. 나도.

 

메아리가 동굴에 퍼진다. 나는 눈을 뜨고 책상에 앉는다. 1시간 정도 더 공부할 수 있다. 오늘 하기로 나에게 약속한 영어 독해를 3개 못했다. 책을 펴고 연필을 잡는다.

 

 

*

 

 

- 은수야, 너 합격이야! 합격!

 

엄마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침대에 누워있던 나는 천천히 상체를 들어 올린다. 눈을 껌뻑거린다.

 

- 뭐라고?

- 너 합격이라고.

 

엄마가 나를 와락 안으며 눈물을 흘린다. 엄마의 기준과 나의 기준 중간쯤에 있는 대학에 나는 합격했다. 마지막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대학이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와 엄마가 원하는 나의 중간에 서 있는 내가 되기로 했다. 엄마도 애가 타지만 당사자인 내가 제일 힘들 거라는 것을 인정했다. 무언의 타협이었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리듯 엄마도 나를 기다려줬다. 아무리 잔소리하며 나를 들볶아도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사는 그 이상의 결과를 바라는 것은 엄마의 욕심이라는 것도 인정한 것 같다.

 

줄리아 선생님이 옳았다. 삶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 끝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 길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알 수 없기에 그냥 걸어보면 된다.

 

동생이 방에 있는 나를 데리고 나온다. 아빠,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티라미수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나를 바라본다. 모두가 나를 축하해 준다. 이런 날을 꿈 꾸어 오던 지난 1년이 파노라마가 되어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나는 합격을 하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다.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나도 평상시처럼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달라진 것은 내가 대학생이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다. 이제 재수생이지 않아도 된다.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위안이 되었고 어떤 대학 생활이 펼쳐질까 생각하는 내 마음에는 작은 흥분이 고여 들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는다. 동굴은 샹들리에가 달린 것처럼 밝다. 나는 밝은 길을 걷는다. 아치형 입구를 향해 당당히 걸어간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쑥 들어선 그곳은 온통 하얗다. 아무것도 없다. 이제부터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이다. 내가 하나하나 그려나가야 하는 곳. 하얀 백지의 삶 위에 나는 나만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다. 시작은 동굴이었다. 동굴은 다른 세계로 이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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