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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

동굴로 들어간 재수생 3

길게 이어져 있는 줄 마지막 사람 뒤로 가서 선다. 그 사람에게 묻는다.

 

- 여기에 서 있으면 1등급 마을에 들어갈 수 있나요?

- 꼭 그런 건 아니에요.

- 그러면요?

- 문 입구에서 질문한대요. 옳은 대답을 하면 이 마을로 들여보내 준대요.

- 어떤 질문이요?

- 글쎄요. 사람마다 다른 질문을 한대요. 저는 여러 사람에게서 예상 질문을 뽑아서 읽어 보고 답도 외우고 왔어요.

- 누가 그걸 결정한대요?

- .. 저들이 만든 위원회가 있대요. 거기서요.

- 1등급 마을에 살면 뭐가 좋아요?

- 나도 잘은 몰라요. 그냥 기회가 많대요. 미래에 더 잘 살 기회요.

- 잘 살 수 있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그 여자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 이봐요. 그런 마음으로 뭘 해요. 그저 믿고 그냥 앞으로 계속 달려가야죠. 아니 그리고 그런 질문은 여기 오기 전에 본인한테 물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여자는 툴툴거리며 돌아서서 예상 질문지와 답지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잿빛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진다. 선명한 빨강이다.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검은 우산을 펴 든다. 검정 우산 위로 빨간 빗방울이 또르르 흘러 땅으로 떨어진다. 웅덩이에 빨간 물이 고인다. 나는 한참을 멍하니 빨강 비를 쳐다본다.

 

재수생인 나에게 열리는 기회라는 것은 명성 있는 대학인 걸까? 대학의 명성은 누가 만드는 걸까? 그 대학의 전통일까? 사람들이 열광하는 대학의 이름은 그만한 가치를 대학 교육으로 실현하고 있을까? 물음표가 내 주변을 둥둥 떠다닌다.

 

나는 서 있던 줄을 이탈해서 공원 쪽으로 걸어간다. 회색 천을 깔아 둔 하늘 위로 용이 날아다닌다. 어둡고 흐린 하늘 위로 용이 나는 모습이 활기차고 멋지다. 용에게 오썸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녀석에게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영어로 오썸은(awesome)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는 뜻도 있고 최고로 멋지다는 뜻도 있다.

 

줄리아 선생님이 나에게 자주 오썸 하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선생님에게는 아주 멋진 사람이다. 그 생각을 하면 힘이 난다. 나도 누군가에게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나는 검정 파라솔 아래 앉아서 내 연습장과 연필을 꺼낸다. 나무 위로 날아다니고 있는 오썸이를 그린다. 내 머리 위에서 불을 뿜고 이리저리 휙 날아다니던 오썸이 내 옆으로 내려앉는다.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긴 꼬리로 내 옆구리를 찌른다.

 

- 놀자고? 나 그림 그리잖아. 1등급 마을에 들어가야지.

 

가만히 듣고 있던 용이 배를 까고 벌러덩 드러눕는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애처로운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 어쩌라고? 타라고?

 

오썸이는 바로 등을 뒤집어 내 앞에 앉아서 기다린다. 나는 오썸이의 튼튼한 등 위로 올라탄다. 오썸이를 꽉 잡고 소리친다.

 

- 준비됐어. 오썸, 출발!

 

밑에서 본 하늘은 잿빛이었는데 용을 타고 나르는 하늘은 본연의 색깔을 띠고 있다. 고운 하늘색. 예쁜 하늘색. 구름 사이를 지나고 산을 지나고 알록달록한 마을이 저 아래 보인다. 1등급 마을은 온통 까맣다.

 

우리는 바람을 가르며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하늘을 나는 기분은 무슨 일이든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갑자기 오썸이 급정거를 하고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내가 떨어진다. 빨간 빗방울과 섞여 나란히 떨어지고 있다.

 

눈을 떴다. 내 옆에 거구의 아저씨가 다리를 쩍 벌리며 앉느라 앞으로 축 처져 있던 내 머리를 쳤다. 그 아저씨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숨을 색색거렸다. 왜 사람 쳐 놓고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해요, 하려다 그만둔다. 동굴에서 나온 나는 별 말썽 없이 하루를 보내고 싶다. 공부할 에너지를 아껴두어야 하니까 다른 것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재수생 세상에는 오직 등급을 올리기 위한 공부와 그림만 존재해야 한다. 그래도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나는 오늘도 그 길을 걸어간다.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서 집으로 간다. 숨 가쁘게 시작된 하루가 조용히 떠나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너무나도 비슷하다. 혹시 나는 같은 날을 반복하며 사는 건 아닐까.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봤다. 영어 성적이 68점이 나왔다. 2점 차이로 나는 4등급이 되었다. 작년에 겨우 3등급까지 올려놓았던 성적이 아무리 해도 4등급이다. 그것도 1, 2점 모자라서. 틀린 문제를 다시 확인하고 공부한다.

 

사실 내가 70분 안에 영어 듣기 17문제와 독해 지문28개를 모두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중간 33번부터 40번까지는 찍는다. 확률적으로 어떻게 찍는 게 유리한지 늘 연구하지만, 적중률은 낮다. 운이 내 편이 되어주길 늘 바랄 뿐이다. 나도 시간이 있으면 다 풀 텐데. 그러면 다른 친구들도 다 풀겠지. 어째서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가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독해 지문을1분 안에 읽고 내용을 파악하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가?

 

역시 물음표는 지칠 줄 모르고 생긴다. 나는 망치로 물음표를 탕탕 때려서 찌그러뜨린다. 내가 마주한 현실에서는 그냥 문제를 푸는 게 나에게 득이 되니까 그냥 문제를 푼다.

 

오늘 내가 외워야 할 단어는 백 개. 인간의 머리로 이게 가능한 일인가 또 의문이 들지만 그래도 또 외운다. 단어 시험을 보고 뒤돌아서면 줄줄 새어나가는 이 짓을 나는 늘 반복한다. 등급을 올리려면 단어를 외워야 하고 그래야 그럴싸한 대학에 간다고 들었으니까. 도대체 대한민국 영어 교육은 어째서 아직도 이 모양일까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현실의 나는 그 감정을 동굴 속에 침잠시킨다.

 

국어 성적은 6등급에서 5등급으로 올렸다. 거기서 8개월 내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에게 요구되는 등급은 영어 국어 암기과목 2등급이다. 현재 나의 등급은 영어 4등급 국어 5등급 암기과목 3등급이다. 내 머릿속 자욱한 안개가 진한 한숨이 되어 새어 나온다. 누구도 내 한숨의 무게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재수학원에서는 각자 공부를 하느라 바빠서 모두가 말을 아낀다. 마음 한구석이 찌그러진 듯 다들 무언가에 억눌려있다.

 

재수학원은 공릉동에 있고 미술학원은 노량진에 있다. 이동시간이 만만치 않지만 3년간 그림을 그린 곳이고 입시를 해야 하니 옮길 수가 없다. 그림을 그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많은 인파가 어디선가 끊임없이 몰려나온다. 수천 시간의 피곤이 겹겹이 쌓인 얼굴은 비장하다. 삶은 누구나 이토록 치열하게 살아내야 하는 걸까? 좀 설렁설렁 살면 안 되는 걸까?

 

안 먹히는 점심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나는 야외 벤치로 나간다. 점심시간이 20분 정도 남았다.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앞을 바라본다. 어느새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다. 나무 아래에도 수북이 쌓여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오늘은 동굴을 통과해서 입구에 다다를 수나 있을까? 패잔병처럼 의욕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 할까?

 

눈을 감는다. 어두운 동굴 속을 걷는다. 어딘가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따라 걸어간다. 넓적한 바위가 놓여 있다. 흐물거리며 녹아내릴 것 같은 사지를 뻗고 거기에 눕는다. 더는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다고 인정하는 순간 눈에 눈물이 고인다. 주르륵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보다 못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으니까 그래도 힘을 내며 살아야 하지. 그렇지. 나도 힘들지만 그래야 하는 거야. 공부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하잖아. 엄마 아빠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다고 하잖아. 그런데 엄마는 취업해야 해서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잖아. 나는 엄마와 아빠가 경제적으로 밀어주고 있잖아. 내가 어떻게 힘들다는 말을 해. 그럴 수 없잖아.

 

그래도 나 힘들어. 배우고 싶은 거 다 배울 기회를 준다고 하잖아. 그런데 왜 못하냐고 하잖아. 맞아, 그런데 왜 나는 못하지? 뭐가 잘못된 걸까? 공부도 대학도 다 싫고 그림만 그리고 싶은 나는 바보지. 운이 좋은 줄 알아야 하는데 매일 죽을 것처럼 힘들다고 하면 안 되는 거지. 하지만 나는 나잖아. 그냥 나로 살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누워서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의 포로가 된다. 어디선가 맑고 청량한 소리가 들린다.

 

- 은수야, 일어나 봐. 내가 손잡아 줄게.

- 줄리아 선생님?

- . 나야. 은수 일어나면 업어 줄게. 우리 저기로 가보자.

 

줄리아 선생님이 동굴 끝에 있는 입구를 가리킨다. 나는 선생님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 샘이 나를 어떻게 업어요. 나 살 많이 쪘어요. 공부하느라.

- 그래도 할 수 있어. 우리한테는 오썸이 있으니까.

 

줄리아 선생님이 휘파람을 분다. 오썸이 우리에게로 날아와 씩 웃고 있다. 덩달아 내 입꼬리도 살짝 올라간다.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오썸의 등 위로 오른다. 줄리아 선생님이 오썸의 목 주변에 빨간 목도리를 잘 감아서 손잡이처럼 잡는다. 오썸은 초록색이다. 빨간 목도리를 목에 두른 오썸은 나에게 온 크리스마스 선물 같다. 우리는 까르르까르르 여기저기 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날아다닌다.

 

- 오썸, 바다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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