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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구의 삶에 대하여 “Honey, a novel, not a noble.” S가 받아쓰기해 온 영어 듣기 내용을 고쳐주며 J가 말했다. (J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honey’라고 부른다. 저 꿀 아닌데요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왜 자기를 honey라고 부르냐고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J가 쓰는 honey는 애정을 담아 아이를 부르는 호칭이다.) S가 졸음이 그득한 두 눈을 껌뻑거렸다. “novel? 그게 뭔데요?” “쌤이 좋아하는 거 있잖아.” “아, 소설이요.” “응. fiction이라고도 해.” “그건 뭔데요?” “허구.” “그건 뭔데요?” “허구? 음...... 사실이 아닌데 사실처럼 만들어내는 뭐 그런 거 있잖아.” “아, 거짓말이요. 그럼 쌤은 거짓말 쓰는 걸 좋아하는 거네요.” J와 S의 눈이 만났다. 흐흐.. 더보기
X Japan에서 이무진까지 일요일은 J에게 24시간의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는 날이다. 일도 청소도 수업 준비도 안 해도 되는 날이다. 저녁을 먹으러 가까운 엄마 집에 가는 일 말고는 뭐든 할 수 있는 날이다. 일곱 시부터 눈을 뜬 J는 침대에서 뭉그적거렸다. 눈두덩이가 눈에 들러붙은 것처럼 안 떠지는데 더는 누워 있을 수 없었다. J는 벌떡 일어나면서 낮게 뇌까렸다. Damn 목디스크! 아침으로 팬케이크를 할까 잠시 생각했다. 그때 며칠 전에 사 둔 햇감자가 떠올랐다. 더 방치했다가는 싹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자를 꺼내왔다. 옆에 있던 당근도 가져왔다. 흙 당근을 꺼내 보니 가느다란 수염 같은 싹이 허옇게 올라와 있었다. 으악. 어째! 내가 너를 잊고 있었네. 오늘 널 써야겠다. J는 컴퓨터를 켜고 유튜브에서 이무진이라는 이.. 더보기
동굴로 들어간 재수생 4 줄리아 선생님이 오썸을 조종한다. 우리 눈 아래로 보라색 바다가 펼쳐진다. 바다 중앙에 거대한 무지개가 떠 있다. 오썸이 우리를 무지개 맨 위에 올려 두고 제일 먼저 무지개를 타고 내려간다. 오썸의 얼굴이 웃음으로 물결친다. 다음으로 내가 무지개를 타고 쭉 내려간다. 기분이 끝내준다. 바다에 빠지기 직전에 투명 풍선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받는다. 줄리아 선생님도 은수야! 오썸아, 하고 소리 지르며 내려온다. 또 다른 투명 풍선에 착지한다. 풍선은 바다에 둥둥 떠 있다. 줄리아 선생님이 손을 뻗어 풍선 바깥으로 내민다. 나도 그렇게 한다. 우리 둘은 손을 잡는다. 나중에 선생님의 꿈과 내 꿈이 이루어지면 선생님이 그리워하는 호주 골드코스트 바다에 같이 가기로 했다. 우리는 지금 그 바다 위에 둥둥 떠 있.. 더보기
동굴로 들어간 재수생 3 길게 이어져 있는 줄 마지막 사람 뒤로 가서 선다. 그 사람에게 묻는다. - 여기에 서 있으면 1등급 마을에 들어갈 수 있나요? - 꼭 그런 건 아니에요. - 그러면요? - 문 입구에서 질문한대요. 옳은 대답을 하면 이 마을로 들여보내 준대요. - 어떤 질문이요? - 글쎄요. 사람마다 다른 질문을 한대요. 저는 여러 사람에게서 예상 질문을 뽑아서 읽어 보고 답도 외우고 왔어요. - 누가 그걸 결정한대요? - 음.. 저들이 만든 위원회가 있대요. 거기서요. - 1등급 마을에 살면 뭐가 좋아요? - 나도 잘은 몰라요. 그냥 기회가 많대요. 미래에 더 잘 살 기회요. - 잘 살 수 있다는 건 뭘 의미할까요? 그 여자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 이봐요. 그런 마음으로 뭘 해요. 그저 믿고 .. 더보기
아재 개그를 쓰면 망해요 J는 아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아재 개그를 들으면 빵빵 터진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이 정도다. 며칠 전 산을 산책할 때였다 (J는 코로나 때문에 작년부터 헬스클럽에 다니지 못하고 있다. 목디스크라고 진단받았고 매일 산에 간다). 철봉에 매달려서 온몸을 쭉 늘어뜨리기를 여러 번 하고 어르신들 틈에 끼여 다리 마사지를 했다. 그때 유치원생들이 올망졸망 줄을 서서 재잘거리며 걸어왔다. 선생님이 뒤처진 아이들을 기다리자고 했고 아이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섰다.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장난기와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맞은편에 서 있던 할아버지 두 분이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너희들 몇 살이니?” 맨 앞에 서 있던 아이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쭉 펴고 대답했다. “일곱 살이요. 여기 있는 애들 전부 일곱 살이에요.. 더보기
동굴로 들어간 재수생 2 그때 풍선 위가 열린다. 산들바람에 내 긴 머리칼이 위로 향해 날린다. 공기가 내 머리칼을 잡고 나를 위로 쭉 당겨준다. 나는 가볍게 떠올라 풍선 밖으로 날아오른다. 둥둥 떠 있는 나는 깃털처럼 가볍다. 큰 바윗덩이처럼 뭉쳐져 있던 근심과 불안감이 땅 아래로 후드득 떨어진다. 그제야 내 마음에 공간이 생기고 기쁨과 흥이 흘러들어온다. 행복이 뭔지 기억이 되살아난다. 바람이 ‘후’하고 부드럽게 나를 성 쪽으로 밀어준다. 성 옆에 떠 있던 나무가 다리처럼 성 앞에 놓인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나무 위를 걸어 성으로 다가가 육중한 문을 힘껏 밀어 본다.. 꿈적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문이 아주 조금 삑 하고 열린다. 나는 서둘러 내 몸을 쏙 밀어 넣는다. 성 내부는 고풍스럽고 밝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가.. 더보기
중2병에 대한 J의 분석 봄기운이 시시각각 손짓하며 유혹하는 4월. J는 카톡을 들여다보며 허탈하게 앉아 있었다. 한 학생이 ‘steady’라는 단어로 만들어 왔던 문장을 떠올렸다. Being steady is the most important thing whatever we do.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꾸준한 것은 가장 중요하다. 고1 때 J에게 와서 폭풍 성장을 한 고3 H가 만든 문장이었다. H는 자신이 만든 문장처럼 2년 반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아파서 딱 두 번 수업을 빠졌다. 아픈 건 불가항력적이니 괜찮다. 카톡을 보낸 주인공 L은 올해 중2가 되었다. 중1 때 J에게 왔는데 L 또한 꾸준히 하는 것이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영어 수업을 꾸준히 한 번씩 빠졌다. 늘 여러 가지 이유가 따라붙었다. J는 직감했.. 더보기
그러면 넌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한 시간은 얼마나 알뜰하게 쓰일 수 있을까? 올해 중학교 1학년이 된 S는 오자마자 능률 보카 단어를 4일 치 외운 것을 확인받고 제대로 외우지 못한 단어는 단어장에 적었다. 또 단어장에 있는 단어 25개를 직접 쓰며 단어 시험을 봤다. 다음은 단어장에 있는 단어로 만든 문장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영어 글쓰기를 선생님 J와 같이 확인하고 틀린 부분을 고쳤다. J는 시계를 흘긋흘긋 보았다. 1시간 안에 주어진 미션을 마칠 수 있을까를 가늠하는 중이었다. 띠띠띠 띠띠띠. J의 작은 눈이 안경 너머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어 문법책, 듣기 책, 그리고 독해 책을 눈으로 빠르게 스캔하는 중이었다. ‘그저께 듣기를 했으니까 오늘은 리딩을 공부해야 해. 균형. .. 더보기